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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바인더와 데카르트

  • 작성자 사진: sa Nagi
    sa Nagi
  • 2024년 12월 23일
  • 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12월 24일


by 선민




데카르트가 <제1성찰>에서 극단적 회의를 진행하며 자신의 신체를 부정하기까지 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 성찰인 <제6성찰>에 이르러 이전의 회의를 번복한다는 사실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는 분명 마지막 성찰에서 ‘내 신체’를 내 것이 아니라고 의심했던 것은 과도한 의심이었음을 인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어떤 특수한 권리로 내가 나의 것이라고 부르곤 했던 저 신체가 어떤 다른 물체보 다 나에게 더 많이 속한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하곤 했던 것 역시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 신체와는 다른 물체들과 달리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이 신체 안에서, 그리고 이 신체를 위해 모든 욕구와 정념을 느끼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통과 쾌락의 간지러움을 신체 밖에 위치한 다른 부분들에서가 아니라, 신체의 부분들에서 감지했기 때문이다. (AT VII, 76)1

여기에서 그가 내 신체를 ‘나의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생각하는 나’와 내 신체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 둘째, 나는 모든 욕구와 정념을 이 신체 안에서, 그리고 이 신체를 위해서 느낀다는 것. 셋째, 나는 고통이나 간지러움과 같은 감각을 다른 곳이 아니라, 내 신체 부분에서 느낀다는 것. 이중 특히 마지막 근거인 ‘고통’은 후대의 데카르트주의자들에게서 역시 빈번하게 반복된다.2 이들이 강조하고자 한 측면은 비슷하다. 이들은 모두 고통이 외부적인 요소와 직접적으로 관계 맺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고통이라는 감각이 우리를 외부적인 요소와 명확히 구별한다는 점을, 다시 말해 고통이 인식주체에게 속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논리는 무척이나 단순하다. 누군가 이 팔을 찌르면 ‘내’가 아프다. 그러므로 이 팔은 나에게 속한 것이다. 누군가 이 다리를 걷어 차면 ‘내’가 아프다. 그러므로 이 다리는 나에게 속한 것이다. 등등. 이토록 자명한 사실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데카르트와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어떤’ 신체가 ‘내 것’임을 주장한 것이다. 내 신체가 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제안한 데카르트조차 종국에는 자연스럽게 내 신체가 내게 속해 있음을 긍정하게 된다는 점은 내 신체가 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보여준다.3





하지만 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신체가 있다면 어떨까?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내 몸이 내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나의 가슴이 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가슴을 때리면 ‘내’가 아프기 때문에, 이 가슴은 내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명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가슴이라는 것이 내 머리와 허리 사이의 어떤 부분에 붙어 있다는 사실은 영영 부정하고 싶은 일이다.


가슴이 존재한다는 것은 내게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사태보다는 없어야 할 것이 있는 사태에 가깝다. 나는 페니스를 원하지는 않지만, 가슴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매스큘린한 근육질의 다부진 몸매를 갖고 싶지는 않지만, 내 몸에 있는 여성적인 부위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것들을 여전히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잘 모르겠고, 그래서 ‘디스포리아’라는 말을 쓸 때 좀 눈치가 보인다. 이 가슴이 내 것이라는 사실이 막 죽을 정도로 힘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냥 그것이 좀 흉물스럽고, 거슬리고,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엉덩이나 허벅지 같은 여성성이 드러나는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다. 그 부분이 하룻밤새 완전히 사라지면 좋겠다고, 좁은 골반과 잔근육이 있는 소년 같은 다리를 갖고 싶다고 하루에 몇 번씩 생각하긴 하지만, 그게 막 죽을 정도로 힘들지는 않다. 그냥 신발에 작은 자갈들이 들어 있을 때처럼 은근하게 거슬리고 잔잔하게 불편할 뿐이다.


어쨌든 확정할 성별이라는 게 없는 나는 갖고 싶지 않은, 그러나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가슴을 처리하기 위해 바인더를 사용한다. 바인더는 단연코 가슴을 없애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 중 가장 쉽고 간단한 처치다. 바인더를 하면 느껴지는 감각. 육안으로 볼 때 가슴은 판판해진다. 숨 쉬기가 조금 힘들어지지만, 숨이 차게 뛰어다니지 않는 한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약간의 압박감이 안정감을 준다. 굽은 어깨가 약간 펴져서 자세를 고칠 수 있다. 그에 더한 정신적인 변화. 자신감이 생긴다. 나의 결점이 사라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조금 당당해진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갑옷을 입는 심정으로 바인더를 찬다. 편의점에 갈 때도, 아니 그냥 나는 바인더를 차지 않고는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바인더가 없으면 섹스도 못한다. 아주 오래 전 철갑옷을 처음 발명한 사람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좋은 것을 나누는 심정으로 나는 얼마전 이웃 사촌인 알리나에게 바인더를 선물했다. 알리나는 카자흐스탄에서 온 스톤 부치로 우리는 보자마자 친구가 되었다. 나와 애인은 알리나 커플과 종종 함께 모여 논다. 알리나 커플은 한국어를 잘 못하고, 나와 애인은 러시아어를 하나도 하지 못하니 우리는 만날 때마다 뚜쉬뚜쉬 착착착 하며 의성어와 몸짓으로 말하지만, 그래도 우리 넷은 꽤 잘 통하는 조합이다. 알리나같은 스톤부치가 바인더를 알지 못하고 여전히 브레지어를 하 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던 나는 내가 사용하는 브랜드의 바인더를 세 개 정도 사서 알리나에게 선물했다. 그 위에는 정성껏 러시아어로 편지도 썼다. 물론 나는 키릴 문자를 알 지 못하니, 번역기를 사용하여 그리다시피 썼다. 그렇게 따라 그린 러시아어를 다시 번역해보니 나오는 말. “이것은 알리나용 압박복입니다. 사이즈가 맞는지 모르겠네요. 여자의 가슴을 남자의 가슴으로 만들어보세요. 탄탄한. 자세를 교정해보세요.” 이 수상쩍은 편지와 함께 바인더를 받은 알리나는 다행히도 사이즈가 꼭 맞고, 무척이나 편하다며 다음 날 곧장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후 기를 보내왔다. 그(녀?) 역시 나와 똑 닮은 감정을 느낀다는 생각에 나는 왠지 모를 위안을 얻었다.

가슴이라는 연장 실체의 양태를 변형시킴으로써 정신의 평화와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게 지금도 종종 믿기지 않지만, 세상사는 원래 사소하고 우스운 일들로 가득 차 있는 법이다. 예컨대, 지금도 누군가는 가슴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고, 누군가는 가슴을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이 우스꽝스러운 부조리를 보며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은 낄낄 웃고 있지 않을까? 그래, 너는 웃어라. 나는 새해에도 가슴을 더 작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테니.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가슴 공산주의 사회를 꿈꾸며, 가슴을 없애 주는 양질의 바인더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사는 동안 계속될 것이다. 1 데카르트의 저작은 관례에 따라 아당(C. Adam)과 타네리(P. Tannery)가 편집한 다음의 판본에서 인용한다. R. Descartes, Œuvres de Descartes, éd. C. Adam & P. Tannery, (Paris: Vrin 1996) 판본을 축약해 AT로 표기하고, 권수와 쪽수를 함께 병기한다. 번역은 모두 필자의 것이다.


2 대표적으로, Cyrano de Bergerac은 Fragment de physique에서 하나의 사고 실험을 진행한다. 그는 느끼지 않은 최초의 상태의 우리가 핀에 찔리는 경우를 상상하게 한다. 이 경우, 우리는 찔리기 전의 상태보다 더 ‘불편한 상태’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고통’이라는 것이 (핀에 있지 않고) 우리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Jacques Rohault의 Traité de physique에서도 비슷한 사고 실험이 진행된다. 그는 원초적 상태에서 사람이 태어났고, 그가 눈도 뜨지 않았고, 어떤 냄새도 소리도 없는 환경에 있다고 가정한다. 그런 뒤 그의 팔을 핀으로 찌르면, 그는 ‘고통’이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피에르 베일 역시 카이사르를 유아로 상정해보자고 제안한다. 카이사르가 유모의 젖을 빨다가 핀에 찔렸다면, 그는 우유의 단맛에 대한 기분 좋은 지각(la perception agréable)에서 고통의 상태로 즉시 넘어갔을 것이다. 이 내용은 모두 다음의 책에서 재인용. Raphaële Andrault (2024). Le Fer ou le Feu. Penser la douleur après Descartes. Paris: Classiques Garnier, pp. 15-16.


3 쓸데없는 데카르트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했냐고 물을 누군가를 위해 붙이는 사족. 왜 데카르트를 공부하냐는 질문에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종종 관심을 가져준다. 사람들은 대체로 내 논문에 관심이 없지만, 이런 이야기는 좋아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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